사전연명의료의향서 너머, 진짜 죽음 준비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섬세한 과정임을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되었다. 나는 오래전 이미 장기기증희망등록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기에 최소한의 준비는 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다루는 현실적인 의료 제도와 임종 과정을 읽으며, 그 문서들이 실제 내 죽음 앞에서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된 순간, ‘죽음을 대비했다’는 안도감이 크게 흔들렸다.
저자는 노화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언젠가 홀로 외출조차 하지 못하고, 음식을 삼키지 못해 흡인성 폐렴에 걸릴 수도 있으며, 병원에서는 중환자실의 인공호흡기와 수많은 관들 속에 갇힐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두었다고 해도, 법적·제도적 장벽 때문에 실제 임종기 환자로 규정되지 않는 이상 연명의료 중단 선택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병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죽음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또한 영양과 수분 공급은 연명의료에 포함되지 않아, 원치 않아도 콧줄을 통한 주입으로 생명이 계속 연장될 수 있다는 점은 충격적이었다. 결국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죽음을 맞이하려면, 단순히 서류 몇 장의 작성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까지 어디서, 어떻게 치료받을지 혹은 치료받지 않을지를 둘러싼 구체적인 결정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병원 밖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또한 녹록치 않다. 환자의 곁을 지키는 가족의 죄책감, 열과 고통 속에 방치되는 두려움, 그리고 완화의료 인프라 부족이 우리 사회의 냉혹한 현실로 다가온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돌연사"를 꿈꾸거나, 조력사망에 기대려는 이유도 이해된다. 그러나 완화의료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력사망 논의가 먼저 거론되는 현실은 깊은 고민을 던진다.
책을 덮으며 가장 크게 남은 울림은 ‘죽음과 노화를 질병으로만 보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노화는 누구나 거쳐야 할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과거 조상들이 스스로 곡기를 끊으며 마지막을 맞이했던 평범한 죽음이 오늘날의 의료 체계 속에서는 이상한 일이 되어버렸다. 저자는 “죽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경고한다. 그 말처럼 나는 나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싶은지 메모해 보았다. 상급종합병원에는 가지 않겠다, 중환자실 치료는 받지 않겠다, 다만 통증 관리만은 받겠다. 그러나 곧 깨닫는다. 인지기능이 먼저 저하된다면 이마저 내가 온전히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 늦지않게 유언장 대신 ‘의료돌봄계획서’를 작성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가족들이 나 대신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의 의지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마다 문서를 고쳐 쓰며 죽음과 조금씩 친해지는 연습을 해야할 것 같다.
『죽음을 배우는 시간』은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단순히 법적 문서나 제도적 장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은 삶을 조율하는 또 다른 계획이며, 우리의 일상 속에 ‘마지막 순간’을 천천히 끌어안는 일이다. 잘 늙고 잘 죽는 것이 어려운 사회일수록, 죽음을 직시하고 준비하는 작은 노력들이 더욱 소중해진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늘상회』를 보며 떠올린 『100세 인생』 (0) | 2025.09.28 |
|---|---|
| 『삶은 여행』 이상은 (0) | 2025.09.26 |
| 『100세 인생』 린다 그래튼 (0) | 2025.09.24 |
| 『100 인생 그림책』 (0) | 2025.09.22 |
| 『지금이 딱 좋아』 (0) | 2025.09.13 |